2016. 8. 16. 17:15

비행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2012

 

 초이 세번째 모임. 이 책은 나의 추천도서였다. 누군가 김애란의 소설집에 대해 단편소설인데 하나하나 긴 여운을 남기는 책이라고 소개했던 글이 생각나 읽고싶어서 추천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매우 현실적이면서, 매우 아픈, 아름답지 않은 현실 그 자체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 꽤 위안이 된다.  그 아프고, 아름답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김애란의 문장들, 혹은 소설들이 내게 말을 건넨다. 그 슬픔에 대한 위로가 절절하지 않아서 좋다. 그저 담담하게 혹은 무심하게 나의 손을 잡고 걷는다. 너도 힘들지? 그래도 괜찮아- 하고는. 아무런 형용사도, 아무런 수식어구도 없다. 내가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힘든 것을 알아주고는. 하 새끼, 힘내라 인마- 다 그런거야. 하고는 그냥 툭 던져주는. 그 심심한 위로가 더 큰 위안이 되었다. 김애란의 소설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너무 어둡고 불행하다면서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간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소설을 읽었는데 그 안에서 현실보다 더 적나라한 현실을 마주친다면 마음이 불편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 현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만.

 

 예전엔 슬플땐 우울한 기분을 벗어나기 위해 신나는 음악을 듣고, 재밌는 예능을 보고, 즐거운 책을 읽어야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기분이 우울할땐 외려 바닥을 치자, 그 우울의 바닥에서 헤엄치며 우울을 천천히 즐기다가 올라오자-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우울할 땐, 일부러 우울한 노래를 찾아 듣고, 우울한 책을 알아보는 편이다. 그렇게 우울함의 시간을 한참동안 헤메고 나면 결국 남은 것은 다시 올라가는 것 뿐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우울함 속에서 헤메는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p.14

 아마, 그래서 였을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봤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 이라고 답한 것은.

 

p.86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 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 내부에 오랫동안 새겨져 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p.144

 오늘이 내일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이 저녁 같고 새벽이 저물녘 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오랫동안 한 곳에 고립돼 있다 보니 날짜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았다. 세상은 낮에도 어둡고 밤에도 어두웠다.

 

- 이런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다. 말장난같은 문장.

 

p. 97

 이따금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론 두서없고 엉뚱한, 어느 대는 철렁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반짝이는 동전처럼 흘리고 가는 이들이, 용대의 마음을 흔들었다.

 

p.133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디.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있다고. 그 말이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그 다음, 그 곳에 어떻게 갈 지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고. 뜻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친절하다고. 그러니 외지에 나가선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할 줄 아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p.164

 용대는 눈이 뒤집어져 "이게 정말?" 하고 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아이처럼 꺼억꺼억 울기 시작했다. 불명확한 발음으로 씨발년아, 미친년아, 개같은년아를 반복하며, 자길 속인 여자, 이용한 여자, 끝까지 순진한척하는 여자, 이 나쁜 여자를, 살리고 싶다, 생각하면서.

 

- 이 문장은 참... 읽을수록 먹먹해진다. 용대의 감정이 고스란힌 내게 전해진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되뇌이면 되뇌일수록 너무 슬픈 문장이다.

 

p.178

 자신이 이 세상의 풍습에 속하고, 푸옥을 지키는 사람이라는게 좋아서였다. 기옥 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리놀렌, 혹은 오메가3처럼-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p.207

 세계는 생각보다 썩기 쉬운 물질로 이루어져있다.

 

p.251

 은지가 조그맣게 끄덕인 건 이제 그들도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만은 없는 나이가 되어서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 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 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 이 비행운이라는 단편소설집에서 호텔 니약 따와 서른 이라는 소설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를 울리는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고민하던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에 대한 이야기가. 내가 성급했고, 나 자신을 독촉할 수 밖에 없었고, 나를 힘들게 했던, 나를 지치게 만들었던 그 시간들이 이 소설속에 있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너무 아팠다. 그리고 이 소설은 나를 위로해줬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p.263

 그러니까 좀 생뚱맞긴 해도, 은지가 스피커를 가져온 것에 서윤이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사실은 좀 기쁘기까지 했다. 소리에도 겹이 있다는 것, 좋은 스피커를 통과한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건축이 된다는 것, 그것도 그냥 건물이 아니라 대성당이 된다는 걸 서윤도 어렴풋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p.277 

 은지는 MP3플레이어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찾아 재생 단추를 누른 뒤 불을 껐다. 은지는 새우잠을 자듯 모로 누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연주곡을 경청했다. 그러곤 '1700년대 바흐가 작곡한 음악을, 2000년대 캄보디아에 온 한국 여자가 1900년대 글렌 굴드가 연주한 앨범으로 듣는구나' '이상하고 놀랍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 이런 문장은 친구들에게 내가 써먹고 싶은 문장이다. 좋은 말이다. 만날 일 없고 만날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이라-

 

P.292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 생기는 온갖 기대와 암시, 긴장과 비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꽤 아는데, 자식 노릇, 애인 노릇 등 온갖 '도리'들을 미뤄오다 잃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닌데, 좁고 캄캄한 칸에서 오답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혼자 나이 먹어갔을 언니의 청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P.293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딸므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 292페이지와 293페이지의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내 청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런 문장들 때문에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문장으로 담아낸 김애란이 무섭다. 그런 생각을 한 적있었다. 나이가 들고, 누군가는 환경미화원을 하고, 누군가는 경비원을 한다. 그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그들이 10대 혹은 20대일때, 그들은 과연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 눈빛이 반짝반짝 빛날 때 과연 그런 꿈을 이야기했었을까? 그들은 자신이 환경미화원 혹은 경비원이 될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그 누군가는 메꿔야하는 그 자리에. 나는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고 확증할수 있을까? 하는 물음들이 빗발쳤다. 예전에 삼촌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순 없을지언정,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지는 않아야 되지 않겠냐"고 했었는데.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는 물음. 이것은 냉혹하지만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갑고, 냉정하다.

 

p297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이 몇 단어 되지 않는 한 문장의 울림이... 너무나도 커서 나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는지 모른다.

 

 

p.315

 

언니, 가을이 깊네요. 밖을 보니 은행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후드득 머리채를 털고 있어요.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에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 이런 문장을 주면, 울 수밖에 없다고.  

 

 

 

 

   

 

 

 

 

 

 

 

 

 

 

 

 

 

 

 

 

 

 

 

 

 

 

 

 

 

   

Posted by CCHIO'